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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3일 설교 | 김종윤 목사 | 2022-10-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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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약함이란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약함을 보이는 순간 적의 공격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약함을 감추려고 합니다. 오히려 일부러라도 자신은 함부로 할 수 없는, 힘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어필하는 편이 불이익을 받지 않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흘러가지만 과연 하나님의 편에서도 그럴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함을 최고의 재료로 삼으십니다. 스스로 강한 자라 여길 때 오히려 하나님은 그가 약해질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를 적극적으로 약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 지켜야 될 것은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가이사랴에 감금된 채로 유대인들에게 여러차례 고발을 당하면서 소송에 휘말린 바울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세상의 흐름을 개인은 사실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변호했지만 당시의 권력자들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새로운 신임총독 베스도가 부임하게 되면서 상황은 변화되고 있었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상황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한 입장과 처지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는 것은 있기 마련입니다. 가야할 길이 복잡해지는 것은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 때로 모르는 사람이 길을 엽니다.
자신을 찾아온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에게 당시 현안을 설명하는 베스도에게서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총독 스스로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발언을 한 것입니다. 이는 이전 총독이었던 벨릭스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과는 상반된 표현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잘 알고 있으면 훨씬 더 올바르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베스도와 벨릭스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때로 아는 것이 병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알아야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잘 알지 못해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 자기를 지켜주기를 호소하므로 – 힘없는 이의 호소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입장에 따른 여러 요구들이 존재합니다. 물론 이런 요구들이 모두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받아들여지기도 거절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경우 당연히 힘 있는 이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권이 관련되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약함이 길이 되기 위해서는 힘없는 이들의 호소에 더욱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아픔의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성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 하고 왜 상처를 받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질문하게 됩니다. 아프니까요 그래서 희망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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